②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과 박정희 정부의 강산개조 성과


박정희 정부,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 영향받아
 

   산림녹화·치산치수정책 강력 추진     
           
제3공화국의 물관리 치적 중 단연 으뜸은 다목적댐 건설


   
▲ 안기희 박사


환경전문가인 안기희 박사는 정부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강산개조론’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산개조론’은 도산 안창호가 주장했고, 제3공화국인 박정희 정부에서 성과를 거둔 정책이다.

본지는 안기희 박사가 특별기고한 ‘4대강 살리기 강산 개조정책 과제와 정책방향’을 지난호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과 이를 본받은 박정희 정부의 강산개조 성과에 대해 게재한다.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
① 강 살리기와 강산개조론 연관성
②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과 박정희 정부의 강산개조 성과
③ 이명박 정부의 강산개조정책 과제
④ 4대강 살리기 정책방향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은 1919년 독립선언서의 새로운 물결을 따라 이승만 등 해외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대거 상하이로 모이는 시점에서 독립 이후 한국 재건의 주요 제일 정책과제를 대내외에 밝히고자 국무총리 대리로서 작심을 하고 한 연설 내용으로 추정된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은 산림 황폐화 및 빈발하는 가뭄과 홍수 등 열악한 국토 환경을 개탄, ‘강산개조론’을 주창했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세워진 안창호 선생의 동상.
“…우리 한국을 문명한 한국으로 만들기 위해 개조사업에 노력해야 하겠소. 우리의 교육과 종교, 우리의 풍속과 습관, 우리의 음식과 의복, 거처까지도 개조해야 하겠소. 우리의 도시와 농촌도 개조해야 하겠소. 심지어는 우리의 강산까지도 개조해야 하겠소. 강산을 개조하여 그 목재로 집을 지으며 온갖 가구를 만들 수 있고, 그 물을 이용하여 온갖 수리에 관한 일을 하므로 이를 쫓아서 농업·공업·상업 등 모든 사업이 크게 발달됩니다. 강과 물이 개조되면 자연히 금수·곤충·어오(漁鰲)가 번식됩니다.”

또한 “울창한 숲 속과 잔잔한 물가에는 철인도사와 시민화객이 자연히 생깁니다. 그래서 그 민족은 자연을 즐거워하며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높아집니다. 이와 같이 미묘한 강산에서 예술이 발달하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오. 만일 산과 물을 개조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자연에 맡겨두면 산에는 나무가 없어지고 강에 는 물이 마릅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큰비가 오면 산에는 산사태가 나고 강에는 홍수가 넘쳐서 그 강산을 헐고 묻습니다.”

도산의 ‘강산개조론’ 연설내용을 크게 나누어 보면, 전반부에서는 “우리의 교육과 종교, 우리의 풍속과 습관, 우리의 음식과 의복·거처까지”로 요약되는 ‘민족의식 개조론’에 대해 주장을 했고, 후반부에서는 “우리 도시와 농촌, 농업·공업·상업, 심지어는 강산까지”의 ‘국토개조론’에 대해 역설을 했다.

강연 전반부의 ‘민족성 개조론’은 도산의 선각적 환경미화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교육, 종교, 풍속, 습관, 음식, 의복, 거처 등 문명된 미국과 비교하여 개조 할 점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은 것이나 독립할 자격도 갖추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이 깨어 있지 못하고, 교육·과학·문화적으로 문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도산은 미국 첫 유학생활 중 자기교육이나 독립운동보다 더 절박한 것을 당시 거의 문맹인에 가까운 교민생활의 노동주선과 환경의식 고취라 믿고 학업을 3년 간 중단하고 조국을 잃은 교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한 미국사업가는 자기 집에 세들어 사는 한국교민들의 아름다운 환경변화를 지켜보면서 “당신네 나라에서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온 모양이요. 그러기 에 몇 달 동안에 당신네들 생활환경이 놀랍게 변한게 아니겠소.” “도산 안창호의 지도력 덕분이오.” “불과 1년간의 지도로 이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분은 매우 탁월한 인물이리다. 나 그 분을 만나게 해주시오.”

안창호 선생, 산림 황폐·가뭄·홍수 등 열악환경 개탄
‘강산개조론’ 주창·선각적 환경미화운동 적극 전개


얼마 후 도산을 만나본 미국사업가는 26세 밖에 안되는 새파란 청년으로 매일 교민이 사는 집을 집 안팎 청소, 화장실 청소와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 변소 수리, 정원 손질, 냄새나는 돼지우리 청소, 집안 정리정돈, 부엌개량까지 봉사활동을 전개해 온 사실을 알고 크게 감복되어 특별혜택까지 베풀었다. 결국 자기 집에 세 든 한국인의 집세를 덜 받고, 한국교민들이 모이기 위한 회관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도산은 후일 이 회관을 발판으로 한인친목회→ 공업협회→ 국민회→ 흥사단 조직발판으로 발전하면서 스스로 일구어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의식혁명 정신과 인격혁명 정신으로 응집되어 ‘강산개조론’ 강연에서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민족성까지 개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창한 것이다.

환경개조론을 주요 개혁과제로 삼아

도산의 ‘강산개조론’의 후반부는 ‘국토개조론’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와 농어촌, 심지어는 우리의 강산까지도 개조해야 한다”고 ‘강산개조’가 가장 어려운 국토개조 과제임을 절규하고 있다.

도산은 대동강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자연을 사랑했고, 꽃가꾸기를 좋아했고, 선각자 필대은 등과 어울려 묘향산 등 명승 절경지를 여행하면서 울창한 산림과 헐벗은 민둥산을 비교하면서 탐관오리의 실정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선각적 잣대로 개탄하면서 울분을 삼켰다.

도산은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로 인한 산림의 황폐화가 절대가난의 질곡으로 이어졌다고 믿었다. 국정의 문란, 관리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산림은 관리·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수탈의 대상으로 변했다. 산림을 가꾸는 주체는 없이 경쟁적 남발만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 속에서 산림을 권문세가의 사점(私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온 산이 민둥산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삼남지방의 연이은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거듭되자 수세를 못 내겠다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처형을 가한 탐관오리들로 빚어진 동학란의 민중봉기운동의 소식은 실사구시의 선각적 사조에 물든 도산의 뇌리에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기슭의 홍수범람으로 흉년이 들자 굶주린 농민들이 화적떼들로 변해 탐관오리들의 곳간을 습격한 류의 홍경래난(洪景來亂)에 대해서도 모두 무정부적인 민란이었지만, 민초들의 자아의식과 개혁사상 욕구의 일면을 겪게 되자 산림 황폐화·가뭄·홍수 관리문제가 독립 이후 최대 주요 개혁 과제로 도산의 뜨거운 가슴에 자리하게 되었다.

또한 도산이 도미 유학 후 귀국하였다가 1910년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인천 제물포항에서 상선을 타고 거국가(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를 부르면서 망명길에 오를 당시 서양 상선인들의 입에서 ‘악취십리(惡臭十里)’ 말이 유포될 정도로 제물포항의 수질오염, 해양오염 등 우리나라의 생활환경은 심각하게 열악했다. 한국의 십리 바깥에서부터 악취냄새가 난다는 열악한 우리의 환경을 지적한 말이다.

도산은 제물포항을 떠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만에 도착하면서부터 조국의 그리운 산하와 악취의 제물포항을 떠올리면서 미국의 문명된 강산정책과 비교하여 독립 이후 국가재건 개혁정책 구상 중 산림녹화·가뭄·홍수대책·악취제거 등 환경개조론을 제일 주요 개혁과제로 삼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강물위기 극복과 함께 악취문제가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여 선결 주요 정책과제로 남아 있다.

도산은 독립 이후 대한민국의 주요 정책구상을 위해 미국에만 머물지 않고 쿠바,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문명된 미국과 가까우면서도 문명국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도산은 특히, 서구문명국가인 영국·독일·네덜란드를 장기 여행하면서 한국의 황폐화된 민둥산과 가뭄·홍수 피해상황을 비교하게 되었고, 후일 러시아와 중국을 두루 여행하면서도 독립 후 거대한 국가 재건계획 하에 이상촌(모범부락) 건립계획으로서의 강산개조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개혁 구상이 독립 기미가 보인 1919년에 ‘강산개조론’에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의 도시와 농촌, 농업·공업·상업 심지어는 강과 산까지도 개조해야 한 다”고 내무총리 대리로서 독립 이후 주요 정치적 개혁과제를 제창한 셈이다.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국토개조까지 광범위하게 혁신과제로 언급한 것이다.

도산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9년에 주창한 이러한 ‘강산개조론’이지만 일생 동안 조국의 강산과 문명된 미국은 물론 강산개조의 가장 모범국인 독일과 영국까지 비교하면서까지 작성된 개혁적 ‘강산개조론’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강산 개혁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선각적 혜안(慧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강물 관리 연계한 치산치수정책 추진
최단기간 물 기근국가에서 물 부족국가로 성공한 나라

박정희 정부, 산림녹화 세계적 성공

우리나라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 집권부터 조국 근대화와 생태 근대화를 동시에 지향해왔다. 이후로 산림녹화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현재는 온 산이 푸른나무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결과로 우리나라는 UN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성공조림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UN 세계식량기구(FAO)는 독일, 영국,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을 세계 4대 조림성공국으로 발표한 바 있다. 독일, 영국, 뉴질랜드는 나무를 벌채한 만큼 꾸준히 조림하고 가꾸어서 계속 잘 유지하고 있는 경우지만, 전국 규모의 황폐한 민둥산으로부터 다시 산림을 완전 복구한 나라는 전례가 없다. 한국이 초유의 모범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 박정희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가뭄과 물 부족 그리고 홍수 범람은 산림이 극도로 황폐화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산림녹화와 강물 관리를 연계한 치산치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 세계적으로 최단기간에 물 기근국가에서 물 부족국가로 성공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사진은 1960년대 물 부족으로 우물물을 기르기 위해 늘어놓은 양동이 모습.

현재 우리나라는 물 부족국가 군에 분류되어 있지만, 세계적으로 최단기간에 물 기근국가에서 물 부족국가로 성공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의 지형은 산악지대가 많고, 하천이 짧고, 유속이 빨라 7∼8월 우기에는 홍수 범람, 건기에는 가뭄으로 용수난이 극심했다.

박정희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가뭄과 물 부족 그리고 홍수 범람은 산림이 극도로 황폐화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산림녹화와 강물 관리를 연계한 치산치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1990년 이후로는 아직 댐 건설이 완성된 것이 없다고 볼 때 우리나라의 댐 및 저수지 총 개수는 약 1만8천 개소이며, 그 중 높이 15m 이상이거나 높이 10∼15m로서 길이가 2천m 이상이거나 저수용량 300만㎥ 이상인 댐은 1천214개로 조사된 실적이다.

유효 저수량을 기준으로 보면 15개 다목적댐이 61.5% 차지하고, 63개 생활용수댐이 14.3%, 1천114개 관개용수(농업용수)댐이 13.1%, 21개 발전용 댐이 1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발전·환경보전 통합발전 지향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정당성을 조국 근대화에서 찾았다. 이를 위해 부문적으로는 경제성장정책을, 장소적으로는 국토개발정책을 다각적으로 전개한 끝에 우리 역사상 전대미문의 발전을 기록하게 됐다.

국토개발정책 가운데서도 초미의 현안을 치산치수(治山治水)에 두었다. 이와 같은 국토개조사업은 막대한 투자, 장기간 소요, 전 국민적 참여 등을 필요로 하는 역사(役事)인 바, 사업의 성공은 이들 필요조건을 어떻게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국토개조론의 세계적 성공사례에 따르면 △관련정책에 대한 통치권 지도자와 정치권의 지속적 관심 △계획과 집행력의 유효한 통합 △관련 정책수단의 유기적 공조가 필수적이라 했는 바(Friedman John, 1973), 박정희 정부의 치산치수 개조정책이야 말로 국내외적으로 국토개조사업의 교과서적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성공요인에는 또한 박정희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해 온 조국 근대화사업의 상승효과도 작용했다. 이렇게 해서 이뤄진 치산치수의 성과는 당대의 수혜에 그치지 않고, 경제발전과 환경보전의 통합발전을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발전(ESSD)이 현재 및 미래세대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재까지도 부합되는 선견지명 있는 정책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정부의 물 관리 치적 중 단연 으뜸은 다목적댐 건설이다. 우리나라가 현재까지 수자원 총 이용량은 1천276억 톤으로, 이중 하천수 이용이 10%인 161억 톤에 머물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댐 이용이 10%인 133억 톤과 지하수 관정개발 이용 3%인 37억 톤의 합(13%)한 160억 톤과 맞먹는 실적이다. 이같이 전 세계가 놀랄 만큼 최단기간의 물관리 정책성과는 아직도 물 기근국가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들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 박정희 정부의 물 관리 치적 중 단연 으뜸은 다목적댐 건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산림녹화와 다목적댐의 건설개혁 치산치수정책을 적극 펼쳐 물 부족을 해결했다. 사진은 팔당댐 전경.

박정희 정부의 수자원 실적은 [그림 1]의 우리나라 수자원 이용현황에서 하천수 이용(13%), 댐 이용(10%), 지하수 이용(3%)에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수자원 이용현황은 [표 2]와 같이 수자원 총량은 소폭 증가했지만, 댐 건설 등 이수시설의 확충으로 총 이용량은 33년간 6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인구증가로 생활용수의 이용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농업용수를 제외한 그 외 용도의 수자원 이용량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림 1] 우리나라 수자원 이용현황

   

산림녹화, 경제발전 상승효과

치산치수에 대한 통치자 박정희의 지속적 관심은 개인적 포한(抱恨)으로 소급된다. 그는 감수성 많은 인격형성기에 나라를 잃은 것이 분명코 산림 황폐화의 민둥산과 강물 부족은 물 관리를 잘못한 통치권자의 지도력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산림 수준이야말로 국력의 성장임을 통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도산 선생 임종기’(기러기誌, 1973년 2월)에서 도산과의 각별한 인연을 피력하고 있다. 도산의 임종과 함께 도산의 무실역행의 실용주의 정신과 ‘강산개조론’의 선각적 정치이념을 뜨거운 가슴으로 접수한 청년 박정희는 도산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서 인지초등학교 청년교사,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독립 후 육군 장성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한 박정희 장군이 군사혁명 후 집권하자마자 5천년 역사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정치개혁공약을 가난의 현장인 국토개조로 겨냥한 것은 도산의 ‘강산개조론’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당시는 산이 민둥산으로 황폐화된 결과 조금만 비가 내려도 홍수가 되어 토사가 유출됐고, 큰비만 오면 제방이 터져 전답이 매몰되고, 조금만 가물어도 하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가뭄이 확대됐다. 산에는 새와 짐승이 사라졌고, 강물에서조차 물고기들이 사라지는 등 생태계의 파괴로 전 국토는 황폐화와 사막화의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이 때 박정희 집권자는 도산의 조국독립 후 제일 먼저 개혁하기로 한 ‘강산개조론’에서 전반부의 의식혁명의 민족개조는 ‘새마을운동’으로, 후반부의 강산개조는 국토개조의 ‘치산치수정책’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 것은 도산과 박정희의 관계로 보아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집권초인 1964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을 국빈 방문하여 그곳의 유명한 산림정책을 눈여겨본 것도 큰 교훈으로 작용했다. 

산림은 비록 인가와 떨어져 있어도 그 보호와 이용은 생활환경과 밀착되어 있던 관계로 같은 맥락에서 산림녹화의 대성공은 경제발전과 밀착된 상승효과의 하나로 작용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가시화 되고, 1980년대에는 농가인구가 총 인구의 57.6%에서 28.4%로 줄어 산림에 대한 압박이 그만큼 줄게 됐다.

1970년을 고비로 하루 임금으로 연탄 25개 정도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연료비가 싸져서 보통 1주일 분의 연료가 해결되자 입산금지가 가능해지고, 그 효과로 산은 다시 푸르게 됐다. 한편 새마을 도로사업을 통해 연탄 트럭이 마을까지 배달되는 농촌지역의 접근성 개선도 산림녹화에 한 몫을 해냈다.

산림행정의 일원화를 위해 1973년 농림부 소속의 산림청을 새마을운동과 지방행정 그리고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 소속으로 이관시키게 된다. 종합적인 산림보호관리는 도지사·시장·군수가, 보존단속은 경찰서장이, 기술지도는 산림공무원이 맡는 삼위일체의 체계로 확립한 것이다. 교육훈련과 전문인력 양성을 통해 거국적으로 임업기술인과 산림공무원을 양성했다.

한편, 댐 건설 등 고난도 현장에 대학 졸업자 중 군복무 대체기간동안 국토건설이용대의 근무자로 투입하여 군복무를 면제케 한 박정희 정부의 통치력과 지도력은 최단기간에 물 기근국가를 탈피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자연보호운동도 적극 전개

성공적인 국토개조사업에는 관련 정책수단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먼저 산림 규제책으로 입산금지 조치강화와 임산물 단속, 그리고 각 기관별 의무조림제를 실시했다. 다음 공공투자로 ‘치산 7개년 계획’(1965∼1971), ‘수계별 산림복구 종합계획 수립’을 실시했고, 유인책으로는 1967년도부터 시작된 ‘재정자금 운영특별회계’를 신설했다. 그리고 제 3섹터 방식으로 산 주인과 마을 주민의 산림계를 시도하여 산림녹화에 큰 성과를 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도산의‘이상국 건립계획(모범부락)’에서 국토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을 연계하여 조국 근대화와 생태 근대화를 성공한 셈이다. 도산의 무실역행정신과 이상촌 건립계획은 우리보다 먼저 북한의 천리마운동, 샛별보기운동, 신부락운동으로 전수됐지만, 박 대통령의 강력한 산업근대화와 생태근대화(자연보호운동)의 동시 추진으로 198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남북한의 성패를 가름하는 일대 쾌거를 이뤘다.

인류의 근대화 200년 역사는 산업근대화에 이어 생태근대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산업근대화가 환경의 대가를 치르는 사이 생존환경 파괴가 심각하여 문명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의 산업화 역시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가져왔음은 서구의 경우와 다를 바 없지만, 그 사이 다행으로 산림녹화와 수자원 확보정책이 성공함으로써 미래적 가치를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경제개발에 착수한 그 다음 해인 1963년에 이미 ‘자연보존협회’를 법정법인으로 신설하여 매년 1억 원씩 기금을 지원하고 후일 1978년 자연보호헌장을 선포하는 등 조국근대화와 생태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한 지도자로도 평가된다.

산림과 물의 가치는 대체로 시장편익보다 그 효율을 시장가격으로 잴 수 없는 비시장 편익에 있다. 산림과 물의 비시장적 가치는 △국토보전적 가치 △생활환경 보전적 가치 △교육 △문화적 가치 △휴양적 가치 △공간적 가치로 분류된다.

   
▲ 한국의 산업화 역시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가져왔음은 서구의 경우와 다를 바 없지만, 산업화 기간에도 산림녹화와 수자원 확보정책을 추진 성공함으로써 미래적 가치를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은 용담댐에 가둬진 수자원.

수자원 장기종합계획 강력 추진 시급

그런데도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의 비용편익분석에서 물의 비시장적 가치보다 시장편익에만 잣대를 들이대어 경제성 분석을 강조하는 일부 학자들의 무분별한 주장은 UN 지속가능발전 세계정상회의(WSSD) 물포럼위원회의가 표방하고 합의한 가치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오늘날 생태조화의 화두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이는 1992년에 개최된 리우 UN인간회의와 2002년 세계환경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지속이용가능한 물’과 ‘물 없는 곳에 미래는 없다’는 취지의 목표 가치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본보기로 산림녹화와 물 확보만한 것이 없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생태보고이며, 미래 자원의 최대가치이자 지속가능 이용이 가능한 자원이 바로 물이기 때문이다. 지구 표면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생명의 70%는 물이라는 진리가 존속하는 한, 물 위기관리는 지도자의 최고 정치적 덕목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제 정부는 국토 재건 차원에서 ‘수자원장기종합계획’ 추진을 미룰 수 없다. 강력한 추진만이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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