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에서 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샘물“조선조 오준의 지극한 효성 하늘이 감복 만들어준 샘물”김성식/한국생태사진가

약수터를 찾아다니면서 이번 탐방처럼 가슴이 뭉클하고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깨닫도록 해주는 감동적인 교육의 샘은 없었다. 짐작하건대 ‘효감천’이란 효(孝)가 메마른 요즘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는 효행심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전북 고창에 있는 효감천은 어릴때부터 효자로 소문난 조선조 오준의 효심을 감탄, 하늘이 감복하여 만들어준 샘물이라고 실화로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지만 신문·방송이나 매스컴을 통해 쏟아지는 소식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부모를 모시고 효도란 명분을 갖고 여행을 떠나서 여행지에서 버리고 오는가 하면, 돈을 안 준다고 살해하는 자식들, 양로원이나 다른 보호시설에 위탁만 해놓고 돌아보지 않는 무심한 자식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 자신만 돌아봐도 15년 전에 77세로 돌아가신 아버님께 근심과 걱정만 끼쳐드렸고, 효도 한번 못해드린 죄가 날마다 사무치도록 후회스럽고, 현재 생존해 계신 86세의 어머님이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데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넉넉한 용돈을 못 드리는 것이 부끄럽고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현실이 경제난에 쫓기고 생활이 너무 바쁘기만 해서 부모를 잘 섬기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도 있다.

부모님들이시여!
그래도 자식은 효도는 못해드려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식의 욕심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효감천은 전설적인 얘기가 아니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있었던 실화로서 역사적인 인물에 얽힌 내용임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는 영호남에서 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샘물이다. 1444년(세종 26년)에 태어나 1494년(성종 25년) 죽을 때까지 효자로 이름이 높던 오준(吳逡)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만들어준 샘물이다.

▲성종도 오준의 효심에 감복, 복호를 내리고 정려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고택 앞에 효감천이 있다.


오준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소문이 났었다. 아버지가 등창을 앓으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병환이 위독한 상황에 이르면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파악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제수(祭水)를 뜨러 다니는 길이 너무 멀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제수를 뜨러 가는데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땅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왔다고 하여 이 샘물에 효감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 성종은 오준에게 복호(復戶)를 내리고 정려(旌閭)를 세웠으며, 효감천 옆에 창효사를 세웠다. 효감천은 주변이 깨끗하게 관리가 잘되어 있고 솟아오른 물이 넘쳐서 잔잔히 흘러내렸다. 관리인을 따로 두지 않아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청결하게 가꾼다고 한다. 샘물 옆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외로운 우물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물맛이 정말 순수하면서도 잔 냄새가 전혀 없었다.

모든 자녀들이 한번쯤 이곳 효감천에 와서 물을 마시고 효를 배워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으면 한다.

▲효감천 뒤편에는 효행에 관한 비석들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샘물 뒤편에 효행에 관한 글이 담긴 비석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는데 天雷湧泉廬下(하늘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 벼락을 쳐 땅을 파서 여막옆에 샘물이 솟게 하니 효감천이라 한다.), 雲伊汚泉震死泉邊(하늘이 효자를 위하여 파준 우물에서 운이라는 여인이 추한 빨래로 샘을 더럽히니 그 자리에서 벼락맞아 죽었다.), 感泉公廬墓圖(살아계실때 다하지 못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 묘옆에 움막을 짓고 정성을 받쳐 3년간 효를 다했다.) 등 참고해 볼만한 문구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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